용인 신중현 선생님의 집입니다.
조명을 하나 가지고 갔는데 사용하질 않았습니다.
워낙 자연광이 좋아서요.
85밀리 1.4
105밀리 매크로 2.8를 사용했습니다.
정정하시더군요.
70니 다 되셨는데 겸손하시고.
나오면서 뵙게 되서 영광이라고 꾸벅 절하고 나왔습니다.
사진은 크게 봐야 하는데 ...
[경향과의 만남]50년 음악인생 ‘앤솔러지 앨범’에 담은 신중현
“음악은 ‘예술성’인데 … 요즘 ‘사운드’만 들려 슬프죠”
이 땅은 시대를 앞서간 이들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신중현(70)은 늘 몇발짝 앞선 탓에 지난 시대와 불화했고, 2006년 은퇴를 선언한 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분투 중이다. 올해는 신중현의 음악인생 50주년인 동시에 칠순을 맞는 해. 최근 1958년부터 2006년까지의 음악을 총 집대성한 앤솔러지 앨범을 출시했다. 지난 25일 경기 용인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집을 짓고 홀로 칩거 중인 신중현을 만났다. “장작 때서 밥도 혼자 해 먹는다”는 그는 오로지 음악만을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잠도 나무 바닥에 접이식 침대 하나를 펴고 잔다고 했다. 인터뷰가 진행된 1층 스튜디오에는 온갖 장비들과 기타, 드럼, 영상 기자재, 전깃줄 등이 어지러이 뒤엉켜 있었다.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지만, 그의 음악 인생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으셨습니다. 소회가 어떠신지요.
“시원 섭섭해요. 은퇴를 했으니까. 돌아보면 내가 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해보고 싶었는데 못한 게 많아 아쉽기도 하고요. 특히 나의 음악이 제대로 대중에게 인식이 안된 게 아쉬워요. 음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힘들었던 세월이 아닌가 싶습니다.”
-2006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이 곳으로 들어오셨는데요.
“이제 나이도 일흔이고, 딱히 설 무대도 없어요. 명색이 음악인이라는데, 활동할 곳이 없다보니 차라리 은퇴하고 조용히 있는 게 낫겠다 싶어 들어오게 된 거죠. 음악하는 사람이 대중 앞에 설 수 없으면 있으나마나 한 거예요. 그래도 아쉬운 것은 여전히 있어서, 인터넷 방송도 하고, 지난 음악들을 정리해서 인터넷으로 공개하는 작업도 하죠.”
신중현의 음악은 언제 들어도 신선하다. 60~70년대에 나온 음악이라고는 믿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만큼 독보적으로 음악의 신세계를 개척해왔다.
“항상 앞서간다는 평을 받았어요. 대중들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동떨어지게 된겁니다. 게다가 75~80년엔 활동 금지도 당하고, 5년 동안 아무 것도 못하니 완전히 대중들에게서 잊혀진 거죠. 해금되고 나니까 강산이 변했더군요. 전혀 나를 몰라요. 80~90년대 와서 ‘빗속의 여인’ ‘리듬 속의 그 춤을(김완선)’ 등을 발표했지만 잘 모르고. 그 상태에서 계속 달려온 거예요. 그리고 은퇴를 해버리니 ‘신중현이 누구야?’ 이렇게 되는 거죠.”
은퇴 당시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나만의 조용한 자리를 찾아가겠다”고 했다. 2006년 그의 은퇴 선언은 ‘아름다운 퇴임식’이기보다 ‘리얼 뮤직’을 천대하는 문화 풍토에 대한 일갈에 가까웠다.
-지금 선생님의 자리는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정한 음악이죠. 음악은 예술성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데 이 사회에는 ‘음악’이 없어요. 사운드, 소리만 있는 거예요. 허전하고 슬프죠. 그래도 떠나고 나니까 신경 안 쓰이고 속 편합니다.”
-허무주의적으로도 들립니다.
“내 성격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다 버리고 둥글둥글하게 TV 나와서 쇼도 하고 그러면 그냥저냥 살 수 있겠죠. 근데 내가 너무 내성적이고, 성질은 있고 그러다보니 (내가 하던 것) 다 버리고 TV 나가거나 딴 거 못하는 거예요. 돈도 없어요. 이대로 있다가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게 좋은 것 같아요. 다만 내가 없어진 후 언젠가는 내 음악성을 알아주겠지 하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옛날 얘기 좀 여쭙겠습니다” 했더니 표정이 밝아졌다. 미8군 무대에서 처음 기타 솔로를 하고 기립박수를 받았던 일화를 꺼낼 때는 당시로 돌아간 듯 들뜬 표정이었다. 무척 세세한 기억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나이였는데 얼마나 어립니까. 악단에 끼어서 연주하고 있으면 미국 사람들이 ‘헤이, 플레이 기타 솔로! 기타 솔로!’ 하는 소리가 들려요. 가는 데마다 그랬어요. 그래서 매니저한테 말했죠. ‘자꾸 솔로 해 달라는데 솔로 해도 되겠냐’ 했더니 해보자고 해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했더니, 그 클럽 왕초가 열쇠 꾸러미를 들고 오더니 주크 박스 속에 꽂힌 ‘도너츠 판’ 3장을 뽑더라고. 그중 하나를 밤새 연습해서 이튿날 바로 리허설도 없이 연주한 거예요. 눈 감고 그냥 했죠. 못 하면 난 잘리는 거니까(웃음). 어떻게 연주가 끝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옆에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나를 발로 툭툭 쳐요. 앞을 보라고. 전부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고 있어요. 더 해달라는 거지. 근데 한 곡밖에 연습을 못했으니까 더는 못했죠(웃음). 그때 많은 용기를 얻었어요.”
-처음에는 기타 교본을 들고 혼자 독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기타 하나 구하기도 힘들었죠. 언제 한 번 가져볼까 하는 생각조차 못했어요. 음악은 하고 싶은데 돈은 없고 해서 직접 만들어 연습했습니다. 사과 궤짝 널판지를 뜯어서 통을 만들고, 거기에 구멍을 뚫고 철사를 끼워서 음을 맞추는 거예요. 그만큼 너무 좋아했어요.”
-75년 이른바 ‘가요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으로 활동이 금지돼 고통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당시에 대한 분노와 회한이 있다고 늘 말씀해오셨는데, 여전히 그러십니까.
“시대적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울분을 견디지 못했는데 지금은 나의 운명으로 돌려버립니다.”
-이후에 고생이 많으셨던 걸로 압니다. 5년 공백 후에는 일자리도 잡기 힘들었다고 하던데요. 지금은 음악하는 환경이 많이 나아졌다고 보십니까.
“더 못해요. 그때는 미8군이라는 거대한 활동 무대라도 있었지요.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요. 진정한 음악인들이 설 무대가 없습니다. 나이트클럽, 룸살롱은 음악이 아니죠. 진짜 음악은 예술성도 있고 사회적으로 풍부한 희망, 정서를 줄 수 있는 겁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어요. 다들 자기 배불리는 데만 신경 쓰지요. 나는 김치만 먹어도 맛있던데.”
록 음악의 씨앗을 뿌린 그는 급속도로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에도 뒤처지지 않는다. 87년 ‘리듬 속의 그 춤을’에서 이미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었던 그다. 요즘 그는 자신의 음악을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과 자신의 홈페이지(www.sjmvd.com)를 통해 음원, 연주 영상을 공개하는 등의 작업을 느린 속도이지만 꾸준히 하고 있다.
“요즘 음반업계 어렵죠. 음악도 중요하지만 생계도 중요해요. 그래서 좋은 음악을 만들면서 경제성까지 결부시키는 방법을 내가 보여줄 겁니다. 이번 앤솔러지 음반도 예전 음반과 사운드가 다릅니다. 디지털로 마스터링을 했지만 아날로그와 비슷한 수준에 와 있습니다. 디지털 세계는 그만큼 발전하고 있는 거예요. 인터넷 상에서도 MP3의 열악한 사운드가 아니라, 좋은 사운드를 들려줄 겁니다. 그 대신 돈을 내라는 거죠. 발전하는 기술을 최대한 사용해 잘 해내는 걸 내가 보여주고 싶어요. 아무도 안 보여주니까 나라도 보여줘야죠(웃음).”
▲신중현은 누구
‘록의 아버지’ 신중현. 1955년 서라벌고를 중퇴하고 17세에 미8군 쇼단에 들어가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58년 ‘히키신’이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독집 앨범을 냈다. 62년에는 한국 최초의 록 그룹 ‘애드포(Add4)’를 결성, ‘빗속의 여인’ ‘커피 한 잔’ 등을 선보이며 한국 록 음악의 시작을 알렸다. 유신정권 시절 대마초 사건 등에 연루, 10여년을 암흑 속에 살았다.
부인은 한국 최초의 여성 드러머 명정강이며, 시나위의 신대철, 서울전자음악단의 윤철·석철 등 3형제를 두었다.
〈 글 이로사·사진 우철훈기자 ro@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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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N CORPORATION] NIKON CORPORATION NIKON D3 (1/158)s iso800 F4.0
조명을 하나 가지고 갔는데 사용하질 않았습니다.
워낙 자연광이 좋아서요.
85밀리 1.4
105밀리 매크로 2.8를 사용했습니다.
정정하시더군요.
70니 다 되셨는데 겸손하시고.
나오면서 뵙게 되서 영광이라고 꾸벅 절하고 나왔습니다.
사진은 크게 봐야 하는데 ...
[경향과의 만남]50년 음악인생 ‘앤솔러지 앨범’에 담은 신중현
“음악은 ‘예술성’인데 … 요즘 ‘사운드’만 들려 슬프죠”
이 땅은 시대를 앞서간 이들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신중현(70)은 늘 몇발짝 앞선 탓에 지난 시대와 불화했고, 2006년 은퇴를 선언한 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분투 중이다. 올해는 신중현의 음악인생 50주년인 동시에 칠순을 맞는 해. 최근 1958년부터 2006년까지의 음악을 총 집대성한 앤솔러지 앨범을 출시했다. 지난 25일 경기 용인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집을 짓고 홀로 칩거 중인 신중현을 만났다. “장작 때서 밥도 혼자 해 먹는다”는 그는 오로지 음악만을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잠도 나무 바닥에 접이식 침대 하나를 펴고 잔다고 했다. 인터뷰가 진행된 1층 스튜디오에는 온갖 장비들과 기타, 드럼, 영상 기자재, 전깃줄 등이 어지러이 뒤엉켜 있었다.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지만, 그의 음악 인생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으셨습니다. 소회가 어떠신지요.
“시원 섭섭해요. 은퇴를 했으니까. 돌아보면 내가 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해보고 싶었는데 못한 게 많아 아쉽기도 하고요. 특히 나의 음악이 제대로 대중에게 인식이 안된 게 아쉬워요. 음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힘들었던 세월이 아닌가 싶습니다.”
-2006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이 곳으로 들어오셨는데요.
“이제 나이도 일흔이고, 딱히 설 무대도 없어요. 명색이 음악인이라는데, 활동할 곳이 없다보니 차라리 은퇴하고 조용히 있는 게 낫겠다 싶어 들어오게 된 거죠. 음악하는 사람이 대중 앞에 설 수 없으면 있으나마나 한 거예요. 그래도 아쉬운 것은 여전히 있어서, 인터넷 방송도 하고, 지난 음악들을 정리해서 인터넷으로 공개하는 작업도 하죠.”
신중현의 음악은 언제 들어도 신선하다. 60~70년대에 나온 음악이라고는 믿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만큼 독보적으로 음악의 신세계를 개척해왔다.
“항상 앞서간다는 평을 받았어요. 대중들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동떨어지게 된겁니다. 게다가 75~80년엔 활동 금지도 당하고, 5년 동안 아무 것도 못하니 완전히 대중들에게서 잊혀진 거죠. 해금되고 나니까 강산이 변했더군요. 전혀 나를 몰라요. 80~90년대 와서 ‘빗속의 여인’ ‘리듬 속의 그 춤을(김완선)’ 등을 발표했지만 잘 모르고. 그 상태에서 계속 달려온 거예요. 그리고 은퇴를 해버리니 ‘신중현이 누구야?’ 이렇게 되는 거죠.”
은퇴 당시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나만의 조용한 자리를 찾아가겠다”고 했다. 2006년 그의 은퇴 선언은 ‘아름다운 퇴임식’이기보다 ‘리얼 뮤직’을 천대하는 문화 풍토에 대한 일갈에 가까웠다.
-지금 선생님의 자리는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정한 음악이죠. 음악은 예술성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데 이 사회에는 ‘음악’이 없어요. 사운드, 소리만 있는 거예요. 허전하고 슬프죠. 그래도 떠나고 나니까 신경 안 쓰이고 속 편합니다.”
-허무주의적으로도 들립니다.
“내 성격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다 버리고 둥글둥글하게 TV 나와서 쇼도 하고 그러면 그냥저냥 살 수 있겠죠. 근데 내가 너무 내성적이고, 성질은 있고 그러다보니 (내가 하던 것) 다 버리고 TV 나가거나 딴 거 못하는 거예요. 돈도 없어요. 이대로 있다가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게 좋은 것 같아요. 다만 내가 없어진 후 언젠가는 내 음악성을 알아주겠지 하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옛날 얘기 좀 여쭙겠습니다” 했더니 표정이 밝아졌다. 미8군 무대에서 처음 기타 솔로를 하고 기립박수를 받았던 일화를 꺼낼 때는 당시로 돌아간 듯 들뜬 표정이었다. 무척 세세한 기억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나이였는데 얼마나 어립니까. 악단에 끼어서 연주하고 있으면 미국 사람들이 ‘헤이, 플레이 기타 솔로! 기타 솔로!’ 하는 소리가 들려요. 가는 데마다 그랬어요. 그래서 매니저한테 말했죠. ‘자꾸 솔로 해 달라는데 솔로 해도 되겠냐’ 했더니 해보자고 해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했더니, 그 클럽 왕초가 열쇠 꾸러미를 들고 오더니 주크 박스 속에 꽂힌 ‘도너츠 판’ 3장을 뽑더라고. 그중 하나를 밤새 연습해서 이튿날 바로 리허설도 없이 연주한 거예요. 눈 감고 그냥 했죠. 못 하면 난 잘리는 거니까(웃음). 어떻게 연주가 끝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옆에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나를 발로 툭툭 쳐요. 앞을 보라고. 전부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고 있어요. 더 해달라는 거지. 근데 한 곡밖에 연습을 못했으니까 더는 못했죠(웃음). 그때 많은 용기를 얻었어요.”
-처음에는 기타 교본을 들고 혼자 독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기타 하나 구하기도 힘들었죠. 언제 한 번 가져볼까 하는 생각조차 못했어요. 음악은 하고 싶은데 돈은 없고 해서 직접 만들어 연습했습니다. 사과 궤짝 널판지를 뜯어서 통을 만들고, 거기에 구멍을 뚫고 철사를 끼워서 음을 맞추는 거예요. 그만큼 너무 좋아했어요.”
-75년 이른바 ‘가요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으로 활동이 금지돼 고통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당시에 대한 분노와 회한이 있다고 늘 말씀해오셨는데, 여전히 그러십니까.
“시대적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울분을 견디지 못했는데 지금은 나의 운명으로 돌려버립니다.”
-이후에 고생이 많으셨던 걸로 압니다. 5년 공백 후에는 일자리도 잡기 힘들었다고 하던데요. 지금은 음악하는 환경이 많이 나아졌다고 보십니까.
“더 못해요. 그때는 미8군이라는 거대한 활동 무대라도 있었지요.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요. 진정한 음악인들이 설 무대가 없습니다. 나이트클럽, 룸살롱은 음악이 아니죠. 진짜 음악은 예술성도 있고 사회적으로 풍부한 희망, 정서를 줄 수 있는 겁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어요. 다들 자기 배불리는 데만 신경 쓰지요. 나는 김치만 먹어도 맛있던데.”
록 음악의 씨앗을 뿌린 그는 급속도로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에도 뒤처지지 않는다. 87년 ‘리듬 속의 그 춤을’에서 이미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었던 그다. 요즘 그는 자신의 음악을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과 자신의 홈페이지(www.sjmvd.com)를 통해 음원, 연주 영상을 공개하는 등의 작업을 느린 속도이지만 꾸준히 하고 있다.
“요즘 음반업계 어렵죠. 음악도 중요하지만 생계도 중요해요. 그래서 좋은 음악을 만들면서 경제성까지 결부시키는 방법을 내가 보여줄 겁니다. 이번 앤솔러지 음반도 예전 음반과 사운드가 다릅니다. 디지털로 마스터링을 했지만 아날로그와 비슷한 수준에 와 있습니다. 디지털 세계는 그만큼 발전하고 있는 거예요. 인터넷 상에서도 MP3의 열악한 사운드가 아니라, 좋은 사운드를 들려줄 겁니다. 그 대신 돈을 내라는 거죠. 발전하는 기술을 최대한 사용해 잘 해내는 걸 내가 보여주고 싶어요. 아무도 안 보여주니까 나라도 보여줘야죠(웃음).”
▲신중현은 누구
‘록의 아버지’ 신중현. 1955년 서라벌고를 중퇴하고 17세에 미8군 쇼단에 들어가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58년 ‘히키신’이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독집 앨범을 냈다. 62년에는 한국 최초의 록 그룹 ‘애드포(Add4)’를 결성, ‘빗속의 여인’ ‘커피 한 잔’ 등을 선보이며 한국 록 음악의 시작을 알렸다. 유신정권 시절 대마초 사건 등에 연루, 10여년을 암흑 속에 살았다.
부인은 한국 최초의 여성 드러머 명정강이며, 시나위의 신대철, 서울전자음악단의 윤철·석철 등 3형제를 두었다.
〈 글 이로사·사진 우철훈기자 ro@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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